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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혹은 이야기 앞의 우리: 안예은의 <섬으로>와 <섬에서>

탈해 2023. 1. 3. 15:55

안예은의 앨범 <섬으로>와 <섬에서>는 그의 음악적 역량 외에도 스토리텔링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말은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잘 쓴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야기의 뼈대와 관절을 잘 잡아내고, 행위자로서의 인물을 배치하며, 이 모든 과정이 기호들의 직조임을 메타적으로 능숙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앨범은 함께 들을 때 그 ‘이야기성’이 뚜렷이 드러나고, 그 '이야기성'은 곧 기호, 이야기에서의 죽음과 이를 받아들이는 윤리적 질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섬으로>의 ‘프롤로그’는 두 앨범을 여는 음악적 프롤로그이면서도 다음 곡인 ‘가자’의 주제로 천천히 이끈다. ‘가자’는 개구리가 눈을 뜨는 봄의 한복판에서 ‘가자’라는 청유형과 ‘봄이 오는구나’라는 서술로 배경과 동기를 설정한다. 배경과 동기는 곧 행위자의 행위로 이어진다. 다음 곡인 ‘출항’에서 화자는 ‘너절한 과거’, ‘홀로의 계절’, ‘비탄/불안으로 뒤덮인 땅’으로서의 과거/현재의 여기를 벗어날 의지를 다진다. 그렇게 '닻을 올려 어기야디영차 나가'는 방향은 내일로서의 바다 너머다. 행위와 함께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나아가는 일은 이야기의 물살을 한결 거세게 추동한다.


https://youtu.be/W18FJ1u5IC4

'닻을 올려 어기야디영차 나가자, 비탄으로 뒤덮인 땅은 뒤로 하고'

 

직전 곡이 무색하게 이어지는 ‘항해’는 잔잔한 밤 바다를 지나는 화자의 회한에 대한 노래다. 어디까지, 얼마나 왔는지 알 수 없는, 시공간이 삭제된 채 현재에 박혀 있는 상황에서 화자는 ‘겁에 질려 뒤를 돌아보’는 동시에 ‘다시 아침’을 바란다. 그러나 ‘북두칠성이 없는 밤’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현재에 머문 화자는 출항 때와는 사뭇 다르게 힘없는 ‘어기야디영차’로 하염없이 뱃놀이만 이어 나간다.

이어지는 ‘난파’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시작한다. 화자는 금방이라도 파도에 삼켜질 것 같은 상황에서 과거에 온 정신을 둔 채 후회만을 거듭한다. 여기에는 어떤 기적도 변수도 없다. ‘황홀한 구원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화자는, 파도의 끝에서 ‘끝이, 끝이 보여. 날 데려가’라는 절규로 미래를 암시하며 퇴장한다. 절박한 상황과 부조화를 빚는 재즈피아노 연주는 절규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음의 폭풍처럼 계속 몰아친다.


<섬으로>의 주인공이 퇴장하고, 이야기는 <섬에서>로 넘어간다.

 

그렇게 주인공이 허망하게 퇴장하고 끝나는 듯한 이야기는 <섬에서>에서 초월적 존재(들)의 목소리로 2막을 시작한다. ‘멀리’의 화자는 잠든 아이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달려라 달려라 가련한 너의 운명을 향해, 한 치 앞 모르니 깨지고 구르고 부딪혀 보아라.’ 화자는 '태양 마차의 바퀴를 빼놓'거나 '머리 셋 달린 뱀에게 피리를 불어 주'는 등 이야기에 깊이 간여하는데, 이런 행동의 목적은 ‘언젠가 기어이 만나는 그날까지’라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출항’과 짝을 이루는 ‘소식’은, 아마도 <섬으로>의 화자와 같은 존재를 섬에서 기다리는 듯한 어떤 초월적 존재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https://youtu.be/y1N9MGSGWhI

'달려라 달려라 가련한 너의 운명을 향해'


그러나 <섬에서>의 화자는 단지 초월적인 존재에서 그치지 않는다. ‘무(無)’의 화자들은 태양의 흐름이나 괴수의 움직임을 넘어 이야기 자체를 설계하는 듯이 보인다. '아무도 없더래. 아무도 없더래? 아무도 오지 않나 봐.' 라는 수군거림 이후 이들은 꿈, 희망, 절망 , 사랑을 주워 모은다. ‘대지와 하늘이 열리고 나서/거인들이 새 나라를 세우고 나서......’로 시작하는 서사시는 화자들이 이 이야기의 담지자임을 시사한다.

그런가 하면 '손을 떠나버린 놋대, 가라앉아버린 고개'와 같은 대사는 <섬으로> 화자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는 듯이 들린다. 나아가 이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험난한 여정을 누가 만들었을까?’ 같은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지는데, 이 역시 순수한 질문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 반은 죽었대’라는 모호한 말과 ‘멀리’의 후렴구를 반복하는 곡 말미의 ‘돌아라 돌아라 불타오르는 나의 작은 별’은, 이 화자가 이야기의 바깥을 이미 충분히 의식하고 있으며, 심지어 응시하고 있음을 알린다.

이런 식의 메타진술은 ‘문’에 이르러 전면화된다.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화자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너'라는 말로 이것이 '이야기'임을 상기한다. '거센 바다의 불호령'을 언급하는 건 화자가 이미 <섬으로>의 난파를 알고 있음을 뜻한다. 이야기가 메타의 영역으로 후퇴한 위치에서는 '이야기들'이 보인다. ‘용을 무찌르는 영웅 이야기, 원수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무엇이든지 준비돼 있어, 전부 그대 뜻대로.' 누군가의 생애와 같던 이야기는 많은 이야기 중 하나였으며, 이제 화자가 말하는 '너'의 앞에는 수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이 드러난다. 나아가 2절의 후렴에서는 용, 영웅, 원수, 사랑도 아닌 ‘라라라’에 맞추어 허밍을 진행하다 ‘이야기’만 명확히 발음함으로써 무수한 이야기의 생산 가능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난파'에서 화자의 절규가 개인의 절망을 뿜어낸다면, ‘너의 뜻대로’를 찢어지게 외치는 '문'의 마지막 부분은 심술궂은 장난 놀음처럼 들린다.

 

'에필로그'는 마치 프로스페로처럼 이야기로부터 환기를 일깨운다.


드디어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섬으로> 각 곡의 후렴 모티브를 연주하며 이야기 속 전환점과 같았던 각각의 면면을 짚는다. 각 주제가 나올 때면 커튼콜처럼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가 함께 들린다. 이렇게 <섬으로>로 이야기를 접한 우리는 <섬에서>에 이르러 이야기의 생산주체 및 과정까지 엿본 셈이다. 그리고 우리, 혹은 곡 안의 관객은 <섬으로>의 비극을 되돌려 들으면서도 박수갈채를 보내며, 심지어 '난파'의 박자에 맞추어 손뼉을 치기도 한다. '에필로그'는 마치 셰익스피어 <템페스트>의 프로스페로처럼, 이야기로부터의 환기를 일깨우고 감상의 여운을 깔끔히 갈무리한다.

 

그리고 남겨진 우리는 무엇을 감상하며 어디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를 떠올린다. 우리는 이야기에 이입했으나 참여하지 않았고(못했고),  주인공의 희노애락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리고 이런 이입과 참여가 공모가 될 가능성을 생각한다. 어쨌거나 우리는 죽지 않으며 거리를 두고 죽음을 감상했다. 우리는 아마 언제든 이 비극과 비극의 공장을 다시 꺼내들을 수 있을 테고, 큰 부담 없이 비슷한 것을 계속해서 느끼리라.

 

 
출항
아티스트
안예은
앨범
섬으로
발매일
1970.01.01
 
소식
아티스트
안예은
앨범
섬에서
발매일
1970.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