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잡문 혹은 둘 다

230302 일기. 걷기, 페달 밟기, 읽고 생각하기

탈해 2023. 3. 2. 23:46

일상이 이어진다. 바람직한 형태, 당초 생각한 형태는 아니지만 아무튼 어떻게든 이어진다. 적어도 그러려는 노력은 계속된다.
이를테면 이렇다. 일어나서 운동을 한다. 운동이 끝나야 비로소 씻는다. 씻고 나면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그리고 안방의 작업실로 향한다. 안방이 작업실인 건 아니다. 정확히는 안방의 침대 옆, 책상이 내 작업실이다. 그렇게 앉아서 뭔가를 읽고, 또 읽는다. 그런 일상이다.

최근에는 폴 프라이의 <문학이론>을 읽는다. 문학이론을 일별하는 강의지만서도 왜인지 늘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이래저래 씨름하다 보니 읽어내지 못할 바는 아닌데, 이걸 ‘읽어내다’라고 표현하는 데에서 모종의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문학이론>을 읽는 건 아마도 오늘까지, 바흐친에 관계된 부분부터 바흐친이 긴밀히 관계된 부분까지 읽는, 딱 그정도까지다.


어제는 날이 좋아 자전거를 탔다. 그간 유산소를 하면서는 <헌터x헌터>를 한 편씩 봤고, 최근 오래 걸은 건 교회 전도사님과 얘기를 하면서였다. 그러니까 제대로 일종의 산책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자전거를 타면서, 나도 몰랐던 온갖 상념이 강바닥을 헤집듯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예쁜 물감으로 서너 번 덧칠했을 뿐인데 어느 새 다 덮여버렸구나 하며 웃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오래된 예배당 천장을 죄다 메꿔야 하는 페인트 장이었구나. 너무도 놀라서,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부분을 따로 기록했다. 꽤 많은 부분이 쓸려나갔고, 남은 부분은 또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오늘은 산책과 조깅을 곁들였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생각이 괴롭힐까 했는데, 자전거도로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다는 표지판을 새삼 접했다. 다리를 짓느라 내년까지 공사를 지속한다는 그 표지판은 강 맞은편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분간 이쪽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겠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이 길을 선호한다. 야트막해짐에 따라 좁아지는 강, 거기에 따라 한적해지고 고즈넉해지는 풍광은 딱 그 정도의 자전거 길에서 내가 사랑한 것들이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몇 번의 찻길과 이런저런 길을 돌아가면 다시 그 길로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스친다. 좋아하고 갈 수 있는 길을 생각한다, 잠시.

오늘 읽은 텍스트는 오늘의 산책에 끊이지 않는 질문과 생각거리를 던져 주었다. 언어가 은유이듯 소설도 그 자체로 패러디다. 소설은 아직까지 새롭다(novel)는, 그 이름에 새겨진 특징 외에 별다른 무언가를 획득하지 않았다, 이는 어쩌면 바흐친의 시기와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 바흐친의 담론은 안정적으로 달라붙을 만한 이론적 토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는 내가 덜 읽어서도 있고, 그 자신의 담론이 그런 이론화를 거부해서일 수도 있고, 혹은 그의 작업 중 무언가가 미완성이어서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현재에는 의미가 없는 걸까. 아니라고, 일단 믿는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며 다른 이런저런 것들을 함께 생각한다. 그래서 서사시는 왜 서사시지? 소설이 된 시는 없나? 소설을 하나의 모드라 치고, 소설 내 장르의 문제를 형식주의나 소설적 특징으로 이러저러하게 끼워맞춘다면, 우리는 ‘장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나저나 우리 시대의 서사시는 가능한가? 그럴 필요와 가능성은 있나? 혹은 그럴 만한 의미가 있나? 그나저나 영상매체로 이행하는 시기에서 소설의 소설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의미가, 있는가?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그간 읽고 감명받고, 무언가 따라서 살아보거나 비슷하게 써보려 했던 것들을 생각한다. 그런 것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의미를 지니는가? 정말로, 지니는가? 몇 년에 걸쳐, 이런저런 돈을 써가며 생각해오는 주제다. 의미를 지니는지, 이때 그 의미란 무엇인지, 애초에 의미란 무엇인지, 그게 있는 건 맞는지. 이런 질문 앞에서는 속절없이 지기 십상인데, 그렇지 않기 위해 그간 뭔가를 믿거나, 믿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거나, 믿고 싶어하곤 했다. 이 경우에는, 문학이, 혹은 글이 실제로 삶과 관계된다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이 강의가 우리의 읽기에서 전환의 순간을 기록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봅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형식주의‘가 역사와 세계에 무관심한 듯 보이고 또 그렇게 주장함에도 어쩌면 결국은 내내 ’삶‘에 관해 이야기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진 않은지, 궁금할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폴 프라이, <문학이론>, ‘16장 독자와 텍스트의 사회적 침투성’ 중


아직은 아이디어에 불과한 것들만 부글거리는 가운데, 논문 이후 펼쳐질 노동 시장을 함께 생각한다. 아마 논문을 쓰며 벼린 생각과 언어를 접어두고 다른 언어의 세계로 편입되어야 하겠지. 이런 미래를 예상 혹은 예감하며 일종의 빠른 언어 전환, 혹은 이종어를 어렴풋이 생각한다. 근데 이런거 미리 생각하는게 그렇게 좋진 않다고 들었다. 그래서 다시 논문 생각으로 돌아온다. 소설 속 언설을 더 알아보고, 소설 속에 드러난 시공간을 생각한다. 그나저나 소설은 왜 소설인지, 왜 중설 대설은 없는지. 그 더럽게 긴 글들도 다들 소설이라 부르지 않나. 그나저나 이론이나 비평은 충분히 어떤 작품의 탁월하(지 않)다 여겨지는 부분을 담보할 수 있나? 그건 얼마나 유효한가? 어떤 기준에서? 이론과 비평의 관계는? 같은 생각을 이리저리 굴린다.


걸음 수나 페달 수가 쌓이면 질문의 갯수와 밀도에도 차이가 생길 것이다. 그런 계절의 이행을 믿는다.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믿고 싶다는 마음으로 어찌저찌 온 현재를 오롯이 인정한다. 그만큼의 내일을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