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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게 네 이야기가 될 거야: 대화를 대화하는 이랑의 <대화>

탈해 2023. 3. 5. 21:08

‘이 세계에는 뭔가 중요한 것들이 있을테고, 그건 내 얘기는 아니라는 것은 난 잘 알고 있어.’ 넋두리 같은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랑의 <대화>(3집 [늑대가 나타났다] 수록곡)는 그 시작이 무색하면서도 제목이 더없이 어울릴 만큼 대화를 논한다.


https://youtu.be/Mq516rVg41k

이랑-<대화>

노래는 베이스를 이루는 단성적 목소리와 반주를 이루는 다성적 목소리, 그리고 두 개의 목소리로 채워져 있다. 이는 이미 노래 전체에 드리운 주제-독백적 자아와 대화적 화자 사이의 대화-를 상징하는 듯하다. 전반적으로 곡은 두 목소리의 주고받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쪽은 대화의 불가능성과 불필요성을 내내 역설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대화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말한다. 편의상 두 화자를 A와 B로 두겠다.

A는 자신의 얘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로 운을 뗀다. 거기에 대해 B는, A가 ‘그렇다면 어떤 얘기들이 남아 전해지는’ 건지 궁금해할 거라 대답한다. 물론 A도 모종의 ‘질문’과 ‘알고 싶은 것’이 있지만 묻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배워 왔기 때문이다. B는 이에 대해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했고 너는 왜 듣고 있었는지’ 묻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독려한다. 이처럼 질문에는 대답이 따르며,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대화를 이룰 것임에도 불구하고, A는 이상하리만치 대화를 거부한다.

여기에는 A의 뿌리깊은 의기소침함과 자기연민이 작용한다. ‘그건 확실해 나는 불쌍해’, ‘난 그렇게 살아왔어.’ A의 학습된 무기력은 곧 자신의 얘기는 중요하지 않으며, 할 얘기도 없다는 진술로 이어진다. 이 부분에서 A의 ‘그래 난 이렇게 할 얘기가 없어’와 B의 ‘그래 그런 게 네 이야기가 될 거야’는 ‘그래’에서 시작해 반대의 의도로 분화된다. B는 ‘네가 먹고 네가 걷고 네가 따라왔던 길’, 즉 A의 삶 자체가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며 ‘들려지게 될’ 거라며 끊임없이 A가 이야기할 것을 촉구한다.

다음의 ‘그래’는 A의 ‘난 네게 싫다고 말을 해’와 B의 ‘넌 내게 싫다고 말을 해’로 분화한다. A의 자기혐오는 그것으로부터 끌어내려는 B에게로 번지고, B는 이를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얘기’를 들려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비관적이고 부정적이고 자조적인 A의 대화 거부는 계속해서 B의 대화 독려를 만난다. 정확히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A의 언설이 B에게 가닿으며 ‘바로 그 얘기’를 하면 된다는 반응을 일으킨다.


말하자면 <대화>는 대화하지 않겠다 ‘말하는’ A와 바로 그것을 얘기해 보라는 B의 대답, 그리고 다시 이를 거부하는 A의 외침, B의 계속되는 설득의 연속이다. 역설적인 것은, 정작 먼저 말을 꺼낸 이가 A라는 점이다. 자신의 얘기는 중요하지 않다는 내용은 상관없다. A는 ‘이 세계에는’ 이라는, 다소 신화적인 표현으로 시작하는 넋두리를 늘어놓았고, 아마도 혼잣말처럼 이 말을 내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필연적으로 B의 대답을 이끌어낸다. 만약 B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침묵하면 되겠지만, A의 거부는 다채로운 대답으로 이어진다. 왜 자기가 얘기할 수 없는지, 왜 할말이 없는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

이런 대답과 대답의 연쇄가 있기에, ‘그만 그만 이제 그만’이라는, 절규와 같은 A의 말 앞에서도 B는 ‘넌 무슨 말로 대화를 시작할래’ 하고 묻게 된다. A의 언설은, 그 내용과 의도에 상관없이 대화의 시작이었고, 그 자체가 ‘할 얘기’이다. B는 그저 이를 뒷받침하며 보조할 뿐이다. 그렇게 둘은 어느새 ‘대화’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단성적 목소리와 다성적 목소리, A와 B의 목소리는 모두, 독백이나 단일한 목소리 여부와 상관없이 어우러지며 대화, 즉 음악을 이룬다.

이런 대화의 교향은 A와 B가 한 개인의 내부에서 길항하는 목소리라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독백 역시 결국 대화라는 점을 드러낸다. 이처럼 <대화>는, 대화하지 않으려는 이와 대화하려는 이가 대화에 대해 논함으로써 결국 대화하는 곡이다. ‘생각만 하고 생각만 하고 생각만’ 하더라도 대화의 가능성은 늘 흐르고 있고, 단지 이야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으로써 <대화>는 다시 커다란 의미에서 B의 독려가 된다. ‘그래, 그런 게 네 이야기가 될 거야. 그래, 그 얘기들을 넌 들려줘야 해.’


바로 다음 곡이 <잘 듣고 있어요>라는 점이 자못 의미심장하지만, 일단 대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대화
아티스트
이랑
앨범
늑대가 나타났다
발매일
1970.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