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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합, 분리, 애도와 잠에 대해: 정우-<옛날이야기 해주세요>

탈해 2023. 2. 28. 22:56
생물학적, 사회학적 오류로 점철된 정보들.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읽지 않거나 어릴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읽지만, 생존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헛소리들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아이에게 꼬박꼬박 주는 것.
— 이영도, <카이와 판돔의 번역에 관하여> 중


정우의 <옛날이야기 해주세요>는 정규 1집 이후 (<종말>, <양> 등에서처럼) 점차 이행하는 그의 음악적 방향성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일종의 자장가로 기획된 이 곡은 벌스 이후 긴 나레이션이 이어지고, 브릿지가 나온 뒤에 다시 벌스를 반복하며 끝나는 간단한 구조를 지닌다. 공연 때에는 내레이션 부분에 정우 본인이 임의로 선정한 텍스트를 낭독했는데, 책 속 한 대목(이를테면 <피프티 피플>, <채식주의자>, <오페라의 유령>,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등)을 읽거나 자신이 직접 쓴 메모를 읽곤 했다. 자장가이자 옛날이야기여서인지 중심이 되는 내레이션이 바뀌곤 했는데, 정식 음원에서는 다른 무엇도 아닌 정우 본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고 여기에 그 방향성의 핵심이 담겨 있다.



https://youtu.be/F8-OZI207Nk

‘그대 밤을 달리는 짐승’으로 시작하는 노래는 가사와 대비되는 잔잔한 반주를 이어나간다. 그러다가 잠에 들듯 무반주로 진행되는 ‘긴 잠을 부르는 들숨’은 ‘소리 없이 스민 한기’ 이후의 피아노 소리와 함께 이내 꿈의 세계로 진입한다.

‘꿈에서 나는 목이 부러져 죽은 사슴이었다. 몇 대 안 되는 승용차와 트럭이 겨울바람 같은 속도로 도로를 내지르고, 건물 위 커다란 광고판엔 진통제 상표가 걸려 있다.’

‘달아나는 발걸음’으로 ‘밤을 달리는 짐승’ 같던 화자는 잠에 들자마자 무기력한 악몽에 시달린다. 부러진 목, 겨울바람 같은 차들, 아이러니하게 걸린 진통제 광고. 깨어난 시간은 새벽이며 ‘두 눈은 하얗게 말라간다’. 이내 일어난 화자는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의 말을 복기한다. ‘그때 이사를 갔었어야 했는데, 하고 매번 후회했어’, ‘네 아빠 말을 들으면 되는 일이 없어’. 이후 과거 어떤 시점의 몽타주가 스친다. ’불행이 엎질러진 외갓집 나무 바닥……카펫. 냉장고. 말라가는 과일이 담긴 바구니’.

화자는 그 시점에서 생각한다. ‘나아질 일이 있을까. 나아질 마음은 있을까. 기회가 찾아온다면 행복해질 자신은 있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시점은 새벽이고, 잠들지 못하는 화자는 여전히 악몽과 불면에 처해 있다. ‘새벽, 내 눈은 하얗게 말라간다.‘ 과거의 일이 어땠든 상관없이 ’삶과 같은 속도로’ 승용차와 트럭이 도로를 내지르고, 그는 목이 부러져 죽은 사슴이 아닌 한 그 삶의 세계에 속해 있다.



내레이션에서 뒤엉킨 건 꿈과 현실뿐만이 아니다. 정우, 혹은 화자의 목소리는 어느새 중년 여성의 목소리로,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다시 화자의 목소리로 이어진다. 어린아이가 ‘네 아빠 말을 들으면 되는 일이 없어’라고 나이에 맞지 않게 타인의 말을 읊조리는 대목에 이르면 타자와 주체, 과거와 현재는 완연히 뒤엉켜 있다. 영어 제목과 같은 ‘새벽’의 시간은 이처럼 다채로운 시공간에 걸친 다설성을 화자-들에게 안겨 준다. 이 대목에서 한없이 사적일 수 있는 화자의 서사는 타인의 서사와 공명하며 확장된다. 그 서사란 제각각의 모양으로 제각각의 시점에 흩어져서는, 새벽까지 두 눈을 하얗게 말리는 악몽과 불면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내게 일어난 재해’, 즉 가족의 비극이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말했듯, 기억은 과거에 대해 하나의 해방일 수 있다. 화자는 악몽과 불면으로 고통받으면서도 괴로운 과거와 조금씩 거리를 둔다. 이를테면 ‘내가 내게 일어난 재해를 똑똑히 바라본다’는 대목은 과거의 그 시점과 현재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나아질 일이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되묻다가도 어느새 ‘새벽’으로 돌아오고, 승용차와 트럭에서 ‘삶과 같은 속도’를 떠올리는 화자는 확실히 현재에 속해 있다.

이런 태도는 브릿지에서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분명 화자는 ‘온 사방을 뒤적이고 둘러봐도 빛이 없’고 ‘쌓인 눈’을 밟는 상황이다. ‘어젯밤은 이 새벽보다’ 나았던 것도 같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좋은 것들 내려둬서 자장자장 잘도 잔다’라며 다시 잠들기를 선택한다.

이어지는 벌스는 처음의 벌스로부터 조금 달라져 있다. ‘밤을 달리는 짐승’은 그대가 아니라 ‘나’가 되어 있고, 긴 잠을 ‘부르는’ 들숨은 ‘달래는’ 들숨으로 바뀌어 있다. ‘내가 내게 일어난 재해를 똑똑히 바라본’ 화자는 ‘목이 부러져 죽은 사슴’ 같던 자신을 마주한다. 과거와 한바탕 뒤섞임으로써 역설적으로 과거와 거리를 둘 수 있게 된 화자는 반대로 ‘그대’라는 거리두기로부터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잠 역시 다소 인위적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화해하며 ‘달래는’ 것이 되고, 침입하는 듯한 ‘소리 없이 스민 한기’는 이내 ’나란히 눕는‘ 한기가 된다.

화자는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을 ‘옛날이야기’로 재의미화하고, 이를 오히려 잠에 이를 수 있는 ‘자장가’로 재구성한다. 실패를 암시, 혹은 선언하는 듯한 현재 이면에는 다른 미래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먼지 같은 기록을 덮고> 마지막의 무기력이 역설적으로 이를 ‘덮고’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과정으로 이어지듯, 과거의 재해와 현재의 불면은 이내 제목을 통해 ‘옛날이야기’라는 가치적-시간적 과거로 묶인다. 밤을 달리는 짐승으로서의 ‘나’는 또다른 ‘나’에게 옛날이야기를 요청하고, ‘나’는 그런 ‘나’를 ‘옛날이야기’로 안심시킨다. 어떤 비극은 어떤 비극으로 저만치 멀어지고, 비로소 후련한 눈물 같은 애도가 시작되며, 아마 그렇게 자장가는 제 역할을 해낼 것이다. 이윽고 내일에의 믿음 같은 잠이 찾아온다.


과거에 머무르거나 침잠한 상태에서 현재로, 자신에게로, 나아가 내일과 뭇 ‘당신’, ‘그대’에게로. 정우의 음악은 점차 타인과 외부를 향한다. 이런 방향성의 한편에는 메모, 일기를 직접 읽는 내레이션이 함께하는데, 이는 (가능하다면) 별도의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지금은 정우가 능히 옛날이야기를 해냈고, 그럼으로써 또 하나의 기점을 쌓았다는 점을 언급하는 정도로 충분하다.

 

 
옛날이야기 해주세요
아티스트
정우
앨범
옛날이야기 해주세요
발매일
1970.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