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 읽고 쓰는

예술가로서의 나, 그리고 가족에 대해: 이랑의 노래를 통한 자기서사 탐구

탈해 2023. 4. 17. 18:46

2018년 6월에 열린 한국비교문학회  <매체의 문학, 문학의 매체> 에서 '자기 서사의 매체 적용 가능성 비교 연구: 영화 <페르세폴리스>와 가수 이랑의 노래 가사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원고 중 이랑의 노래에 관한 부분이다. 지금 보니 어떻게 썼나 싶지만, 뭔가 필요하면 또 쓰겠지. <페르세폴리스> 분석 부분도 재미있었는데 어디 갔는지 찾아봐야 할 듯하다......지금 보면 또 다르게 해석되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지만, 여튼 이랑에 대한 첫 본격적인 분석이므로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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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놀이>는 한국의 영화감독 겸 작가 겸 싱어송라이터인 이랑의 2집 앨범 제목이면서 첫 번째 트랙이자 타이틀 곡이다. 2016년에 발매된 이 앨범으로 인해 이랑은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포크 노래’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당시 생방송으로 진행되던 시상식에서 이랑은 즉석에서 트로피를 경매에 부쳐 판매하는 퍼포먼스로 화제를 모았다. 상술한 것처럼 이랑이 여러 직업을 겸하는 만큼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이랑은 이러한 예상에 대해 자신의 수입 내역을 트위터로 공개함으로써 반박했다. 이후 자신의 궁핍함과 퍼포먼스를 둘러싼 비방과 근거없는 충고에 대해 이랑은 ‘제가 봤을 때 돈 되는 일=한(국)남(자)으로 태어나기임’ 이라고 응수함으로써 젠더 문제를 전면에 부각했다.

 

한편, <신의 놀이> 앨범은 CD 형태가 아닌 다운로드 쿠폰과 함께 각 트랙 가사를 쓰기까지의 생각과 가사들을 담은 에세이집으로 구성되어 판매되었다. 이 에세이집의 내용은 다른 글들을 함께 보충하여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 라는 에세이집으로 출판되었다. ‘나에 대해 얘기하는 걸 멈출 수 없다’던 진술답게 에세이집은 이랑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친구 및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랑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에세이는 어떻게 음악이 되는 과정에서 보편성을 띠게 되었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이랑의 해당 에세이집과 <신의 놀이> 앨범 중 세 개의 트랙, <신의 놀이>, <가족을 찾아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신의 놀이>, 예술가, 이야기

 

2016년 5월 17일,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남역 한복판에서 사람이 죽었다. 이 사건은 여성혐오 이슈에 다시금 불을 댕겼고, 곳곳에서 집회가 열렸다. 이랑은 집회에 참가하여 노래를 불렀다. “사실 저는 여성혐오에 대해 할 말이 정말 많고, 꺼내다 보면 여기서 울고불고 할 것 같으니까 아무 말도 안 하고 노래만 부르겠습니다.” 라는 짧은 언급 이후 시작한 <신의 놀이>는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로 운을 뗀다. 참혹한 비극은 여성들을 모이게 했고, 혐오의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저 가사는 즉각적으로 여성혐오를 상기시켰다. <신의 놀이>는 구체적, 역사적인 시공간에서 한층 더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되었다. 이랑은 이 현상에 대해, 자기 삶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 겪은 혐오와 폭력의 경험이 자연스레 그 안에 녹아 있기 때문에 확장될 수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한 개인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존재하게 하는 세계(사회)의 조건을 함께 설명해야 하며, 이런 점에서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란 일종의 사회적 이론가가 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던 버틀러의 언급처럼, 이랑 역시 ‘내 일상 자체가 여러 사회 문제 속에 있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일상 역시 시사적’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신의 놀이>가 실제 맥락에서 불리면서 보편적인 이야기로 수용되긴 했지만, 이 곡은 오히려 예술가로서 이랑의 정체성 및 자의식으로부터 시작한다.

 

방 청소를 하던 중 예전에 쓰던 수첩들을 발견한 이랑은 그 중 한 수첩에 그려진 이창동 감독의 사인을 보고 과거의 일을 떠올린다. 영화 <박하사탕>(1999)을 처음 본 열 여섯 살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이랑은 이창동 감독을 좇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 입학한다. 이창동 감독에게서 수업을 듣던 어느 날 이랑은 이창동 감독에게 사인을 해달라 부탁했고, 감독은 머쓱해 하면서도 선뜻 사인을 해주며 이랑을 응원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이랑은 스스로 ‘열심히 하고’ 있었는지 되묻는다. 한편, 다른 에세이에서 이랑은 자신이 쓴 대본으로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찍으려 한다. 촬영 도중 조연으로 출연이 예정된 친구가 오토바이 사고로 인해 전치 4주의 부상을 당한다. ‘미안한 건 난데’ 오히려 출연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친구의 사과를 들으며 이랑은 생각한다. ‘나는 왜 이것을 하고 있을까? (......) 남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위의 일화들은 이랑이 스스로 ‘예술가’로서 가지는 자의식과 고민을 보여준다. ‘나는 열심히 하고 있나?’, ‘나는 왜 이것을 하고 있나?’ 라는 질문은 이랑 개인의 정체성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질문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이랑이 생각하는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규명일 것이다. 이랑은 예술의 목적으로 ‘체험에 의한 위로’를 든다. 이랑은 음악, 영상, 영화, 게임 같은 창작물들은 일로 인해 고단한 사람들에게 짧은 위로를 선사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어떤 위로를 받고 싶은지도 알고 싶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어떤 위로를 받고 싶은지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나의 어둡고 슬퍼하는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일은 정말이지 아주 고단하다. 그래도 나는.’ 또, 이랑이 생각하는 예술은 ‘낭비’이기도 하다. “낭비는 재밌는 거야. 나는 낭비하려고 사는데, 낭비 없으면 너희들 가르치고 일만 하고 집에 가서 자고 일어나고 다시 일하고 그렇게 살라고?”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한 음악 창작 시간에 이랑은 예술을 낭비라고 설명하고, 낭비를 직업으로 삼은 어른으로서 스스로를 정의한다. ‘나는 필요 없는 것을 만들어서 필요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런 이랑의 작업은 성폭력 피해자 쉼터에서 행한 작곡 수업에서도 드러난다. 이랑은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가사를 쓰고 노래를 만들어나가는 수업을 진행하는데, 성폭력 경험이 있는 아이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라는 요구가 폭력적이진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이랑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 얘기’가 아니어도 아이들은 얼마든지 다양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이랑, <신의 놀이> MV.

그렇다면 이랑은 ‘낭비’를 함으로써 ‘위로’를 선사해주고 싶은 ‘예술가’로 범박하게 정의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예술의 원재료로서 이랑은 ‘나’들의 이야기를 중요시한다. ‘예술가’로서 이랑의 자의식은 이 지점에서 타인들의 이야기에 다다르고, 이러한 생각들은 <신의 놀이>에 녹아들어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 앞서 언급한 이 서두는 동시대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 ‘나’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묻는다. 혹시 ‘사막에 내던져진 것 같은 느낌’ 가운데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좋은 이야기’를 찾고 있는가? 그러다가 ‘좋은 이야기’ 자체에 신념이 무너지고 의심하게 되진 않는가? 오보에 소리와 함께 이랑은 2절에서 재차 묻는다. ‘요즘도 무섭게 일어나는 일들’, ‘항상 같은 절망과 좌절’을 겪으면서, 우연히라도 ‘이야기를 기다리’며 꼬박꼬박 ‘식사를 하’는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가?

 

위의 질문 이후 첼로 연주로 간주가 이어지고, 한층 고조된 3절에 접어들면서 이랑은 이야기의 전형들을 제시한다. ‘성배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 ‘복수를 하려고 하는 사람’, ‘집을 떠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 ‘제물로 바쳐져 죽음을 맞’는 영웅, 그 영웅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는 사람들. 이랑이 예로 든 이 이야기들은 신화, 전설, 영웅설화를 연상케 하는데, 이로써 이랑은 오래전부터 우리 ‘옆자리’에서 함께 해온 이야기를 원형부터 호출한다. 마찬가지의 텐션으로 진행되는 4절에서 이랑은 ‘여전히 사람들’이 좋은 이야기를 기다린다는 현재적 호출과 함께 사람들이 ‘냄새를 맡’고 모여들 만한 ‘향기’를 지닌 ‘좋은 이야기’의 속성을 말한다. 이러한 ‘모든 이야기’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제물로 바쳐지’도록 만들어지고, 그런 면에서 그 자체가 ‘비극’적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흘리는 피’를 널찍한 접시처럼 떠받치는 것이 바로 눈물을 흘리며 돌아갈 사람들의 일상과 삶이라는 ‘희극’이다. 이때 이야기가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 이랑의 표현으로는 ‘낭비’이고, 여기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위로’라 할 수 있겠다. 사람들은 이야기의 소비(죽음)로 인해 위안을 얻고 다시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가 여느 때처럼 ‘식사를 할’ 수 있다.

 

이랑은 이야기에 대한 메타-이야기를 통해 ‘나’들에게 여전히 이야기를 믿고 있는지 질문한다. 과연 사람들은 아직도 이야기를 찾고 있을까? 이랑은 오래 전 이야기의 원형들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렇다고 대답한다. 최소한의 멜로디와 간단한 구조, 주문과 같은 가사 늘어놓기의 반복을 통해 각자의 ‘나’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삶의 고단함은 이야기에 대한 갈망으로, 이야기의 역사와 구조를 거쳐 이야기의 현재적 호출 및 그 속성으로까지 확장된다. 여기서 이야기의 원재료는 그 각자의 삶들이고, 누군가의 삶에서 추출한 이야기의 죽음으로 인해 그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까지 이야기의 수혜를 입는다. 그렇게 이야기의 죽음을 담은 접시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삶은 희극으로 채워진다.

 

첼로와 오보에에 타악기가 가세하여 한껏 고조된 간주 끝에 브릿지가 이어진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의 끝에서 이랑은, 주문 끝에 담담히 깨달은 듯이 읊조린다. ‘어쩌면 난 영화를 만드는 일로 신의 놀이를 하려고 하는지도 몰라.’ 앞서 1절부터 4절까지 코러스가 덧붙여짐으로써 ‘사람들’에게 건네는 ‘대화’가 진행되었다면, 브릿지에서는 하나의 목소리만으로 이랑 개인의 혼잣말임을 드러낸다. 여기서 ‘영화를 만드는 일’은 낭비와 위로로서의 ‘예술’에 대한 제유라 할 수 있겠다. 어느 개인의 삶에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다면, 또 이런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다다를 수 있다면,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개인을 넘어 보편으로 나아가는 일일 것이다. 필요 없는 것을 만들어서 필요하게 만드는 일, 개인과 보편을 매개하는 일은 이랑에게 있어 ‘신’이 할 법한 일이며, 필요 없는 것을 만드는 일이 선행된다는 점에서 ‘예술’은 ‘놀이’가 된다.

 

신의 놀이’에 대한 깨달음은 다시 코러스가 덧붙여진 하이라이트로서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로 이어진다. 이랑 개인의 혼잣말이 다시 사람들의 목소리(코러스)와 만나고, ‘좋은 이야기’를 기다린다는 문장이 반복되면서 이는 계속해서 현재화하는 선언이자 사명을 띈 요구가 된다. 그리고 그 ‘좋은 이야기’를 받아 아우트로(outro)에서는 모든 반주가 잦아들고, ‘나는 좋은 이야기를 통해 신의 놀이를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는 이랑의 혼잣말을 마지막으로 <신의 놀이>는 마친다. 이렇게 <신의 놀이>를 통해 이랑은 ‘좋은 이야기’를 다루려는 예술가 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서 시작하여 이야기 자체의 확장되는 속성을 밝히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가닿는 또 하나의 ‘이야기-이야기’를 완성한다. 이렇게 <신의 놀이>는 기승전결을 갖춘 음악이라는 매체로 가공한 ‘이야기’를 통해 삶과 사람들을 매개하고, 실제 세계 속에서 사람들에게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이야기로 자리매김했다.

 

2) 나의 이야기, 가족의 이야기

 

 

이랑, <가족을 찾아서> 온스테이지 무대.

 

이랑은 아버지를 많이 미워한다. 이랑의 아버지는 바람을 많이 피웠고, 이랑과 놀아주지도 않았으며, 자주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 또 이랑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못되게 굴었다. 이랑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랑의 어머니는 장애를 가진 이랑의 남동생을 보살피느라 이랑을 신경쓸 수 없었다. 어머니가 아픈 동생을 돌보는 동안, 이랑은 그로 인해 지역 글짓기 대회에도 갈 수 없었고 방송반에 들지도 못했다. 억울한 일이 생길 때마다 이랑은 부서지거나 깨진 물체들을 모았다. 그 조각들을 가지고 있으면 진짜 부모가 나머지 조각을 가지고 나타나리라고 이야기를 지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진 조각은 없어졌고, ‘진짜 부모’도 없었으며, 이랑은 ‘언제나 엄마의 딸이었고, 동생은 항상 아팠다’. 가족에 대한 이랑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가족을 찾아서>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이 두 곡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랑 개인의 이야기를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먼저 <가족을 찾아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곡의 구성은 단순하다. 한 가지 박자로 이루어진 북소리의 반복, 네 가지 코드로 이루어져 느릿하게 반복되는 기타 반주, 하나의 모티브로 이루어진 멜로디의 자잘한 변주가 음악을 구성하는 전부이고, 곡 내내 상승과 하강은 없다. 가사 또한 약간의 변화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비슷한 구조이다. 대신 <가족을 찾아서>는 기타 반주의 박자에 맞춘 강-약의 음절로 리듬감을 형성하고 돌림노래를 통해 의미를 쌓아나간다. 첫 번째 파트에서 ‘내 안에 있는 그 노래’, ‘내가 살고 싶은 그 집’, ‘내가 사랑할 그 사람’, ‘내가 되고 싶은 가족’을 ‘찾는다’는 가사는 ‘나’를 중심으로 하며 미래를 향해 있다. 이는 현재의 상황에서 노래, 집, 사랑하는 사람, 가족을 찾을 수 없음을 뜻한다. 즉 이 파트에서 화자의 시선은 과거, 현재와 분리된 채로 미래에 머무른다.

 

이어 두 번째 파트에서 이랑은 ‘오늘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 ‘내 평생 아빨 용서하지 않은 것’, ‘키우는 고양일 세게 때렸던 것’에 대해 ‘언젠가 후회하게 될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여기서 화자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잘못들을 되짚어보며, 이 잘못들이 본인이 지향하는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칠지를 가늠한다. 이는 ‘고양이’와 ‘준이치’, ‘후회하게 될까’와 ‘후회하게 되겠지’를 빼고는 다르지 않은 두 가지 변주를 동시에 부르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후회하게 될까’와 ‘후회하게 되겠지’의 병치는 물음과 수긍이 사실은 한 가지였음을 그러낸다.

 

세 번째 파트는 ‘이건 뭔가 되게 크게 잘못된 것 같아’의 반복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잘못된 것 같’다는 막연한 부정은 다른 파트와의 병치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첫 번째 파트와 세 번째 파트의 병치는 희구하는 미래에 성립 불가능성을 추가로 암시하는데, 반복을 거치면서 이 긴장은 더욱 크게 반향한다. 이는 이어지는 두 번째 파트와 세 번째 파트의 병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언젠가 후회하게 될까’가 ‘후회하게 되겠지’와 겹쳐지고, 여기에 ‘잘못된 것 같아’가 겹쳐지면서 ‘나’는 말 그대로 후회를 하기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반복을 거치면서, 세 번째 파트는 점차 앞으로 드러나며 크게 울려퍼진다. 마침내 ‘이건 뭔가 되게 크게 잘못된 것 같아’가 가장 전면에 드러나는 가운데, 집과 가족을 찾는다는 첫 번째 파트의 변주가 메아리처럼 떠도는 것을 마지막으로 곡은 마친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후회와 불안이 전적으로 내면을 지배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한 미래가 여전히 미약하게나마 맴도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곡의 화자는 일차적으로 이랑 본인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파트의 변주에서 나오는 ‘준이치’는 이랑이 기르는 고양이의 이름이다. 야속함과 사랑이 겹치는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도, 많이 미워하는 아빠를 용서하지 않는 것도 이랑의 진술과 일치한다. 곡이 끝난 후 실제로 녹음한 이랑의 육성이 나오는 것도 또 하나의 표지가 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가족을 찾아서>는 자신의 노래, 집, 사랑하는 사람, 가족을 찾는 이랑의 독백으로 무리 없이 읽힌다.

 

하지만 이는 화자가 이랑이라는 전제를 두었을 때에만 가능한 독법이다. <신의 놀이>에서 드러나는 ‘예술가’로서 이랑의 자의식이 해당 곡의 ‘나’를 이랑과 동일시하게 만든 것에 비하여, <가족을 찾아서>에서 사실상 가장 직접적인 단서인 ‘준이치’는 변주에서만 간간이 드러날 뿐이고, 오히려 나머지 가사의 내용은 전부 누구에게나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나’의 정체성(노래), 물질적인 보금자리(집), 구성원(사랑하는 사람)을 토대로 이루는 공동체(가족)는 사실 ‘가족’의 성립요건이기도 하다. 미래에 그리는 ‘가족’의 모습은 과거와 현재에 저지른, 그래서 ‘후회하게 될’ 것들과 거리를 둔다. ‘나’가 저지른 일들 역시 시간 및 관계에 대한 각각의 전형들이다. ‘오늘 엄마의 전활 받지 않은 것’은 가족 관계에서 저지르곤 하는 사소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잘못이다. ‘평생 아빨 용서하지 않은 것’은 가족 관계에서 회복할 수도 없고, 회복하려 하지도 않는 오래고 뿌리 깊은 갈등이다. ‘키우는 고양일 세게 때렸던 것’은 가족 관계에서 저질러버린 과거의 큰 잘못이다. 여기에 시간을 뛰어넘어 반복되는 ‘잘못된 것 같아’는 과거와 현재의 잘못들을 미래에도 ‘후회하게 되겠지’ 라고 절감하며 느끼는 좌절이다. 이 좌절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찾을 수밖에 없을 때, 이 ‘잘못된 것 같아’는 과거, 현재의 잘못과 이로 인한 불안을 ‘나’가 찾는 미래의 ‘가족’에게까지 미치게 한다. ‘나’는 시간을 초월할 수도, 분리할 수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건너뛰어 ‘잘못된 것 같아’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결국 ‘나’는 가족 가운데 ‘가족’을 그리며 희망과 좌절을 오가는 존재이다.

 

이렇게 볼 때 <가족을 찾아서>는 이랑의 자기고백이면서도, 나아가 모든 ‘나’들이 가족과 ‘가족’을 생각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는 노래, 집, 사람, 가족, 가족에 대한 잘못 등에서 드러나는 함축적인 표현과 ‘가족’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공동체 단위를 통해 성립된다. 특히 가사가 함축성을 띠는 데에는 단순한 곡의 구조에 걸맞은 가사 형태가 원인으로 자리한다. 희망, 반성, 부정을 대변하는 각각의 파트는 돌림노래를 통해 서로 합쳐지면서 시간축을 아우르면서도 불안, 후회 등 조금 더 다양한 감정을 빚어낸다. ‘가족’에 대해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이랑 본인은 물론이고 ‘나’들의 이야기로 확장될 때에 <가족을 찾아서>는 보편적인 서사로 확장된다.

 

이랑,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MV.

한편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앞서 제시한 곡들과 다소 이질적이다. 우선 이 곡에는 반복되는 가사가 없다. 비슷한 구조는 있지만 각각의 가사는 모두 다르다. 또, 세션 구성으로는 이랑의 목소리와 첼로 한 대의 미니멀한 반주가 전부이다. 박자 역시 규칙적인 연주를 통해 뚜렷하게 드러나는 형태가 아니다. 노래라기보다 판소리가 연상되는 이 곡은 어떤 하루에 대한 이랑의 스케치에서 나왔다. 잠에서 깨어 씻고,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고 작업실에 가서 일을 하는,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의 끝에서 이랑은 조금 다른 경험을 꺼낸다. ‘어떤 사람에게서 하루종일 공격적인 문자가 왔다. 너무 슬퍼져서 눈물이 났다. (......) 눈을 비비는 척하면서 조금 울었다. 실은 많이 울고 싶었다.’ 보편적 일상과 특수한 사건, 무미건조함 속의 뚜렷한 감정 같은 대조 혹은 혼합은 노래를 통해 독특하게 변주된다. 이 곡은 최소한의 템포와 멜로디를 제외하면 음악적 요소가 크게 드러나지 않으므로 가사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 알아보려 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로 시작하는 1절은 ‘나’와 ‘세상 모든 사람들’이라는 극단적인 대립항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부정적 사건의 발생으로 강렬함을 더한다. 이어지는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앞의 가사를 결과로 만드는 원인이며, ‘나’의 사랑과 ‘세상 모든 사람들’의 미워함이라는, 상징적이면서도 어긋나는 불화를 완성하는 짝패 문장의 나머지 한 조각이다. 이러한 불화는 ‘내가 말을 할 줄 안다는’ 당연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칭찬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 상관없이 ‘말과 말 사이의 흥겨움’에만 몰두하는 부조리로 인해 깊어진다. 잠시 사이를 두고 이어지는 가사는 ‘가지 않아도 되는 파티에 초대’받았다는 진술과 ‘초대 명단엔 내 이름이 틀리게 적혀 있었다’는 아이러니를 통해 불화와 부조리를 심화시킨다. 이를 요약하자면,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굳이 필요조건으로 여겨지지도 않으며, 심지어 정체성으로서의 ‘이름’마저 부정 당한다. 부조리극 같은 1절은 ‘나’와 ‘세상 모든 사람들’이라는 상징적 구도를 시작으로 하여 근원적인 거절과 무시와 부정을 드러낸다. 이 상징성으로 인해 ‘나’는 이랑 자신은 물론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과 불화하는 어떤 사람이든 가능해진다. 이처럼 곡은 한 개인의 넋두리에 불과한 것 같은 형식에 상징을 통해 보편성에 다다르는 가사가 뒤얽혀 있다.

 

2절에서 ‘자주적인 삶’을 결심한 ‘나’는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고찰을 통해 선택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하지만 어느새 ‘나’를 둘러싼 ‘일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음을 깨닫는다. 기실 ‘나’의 (비)선택으로 따질 수 있는 주체성은 더욱 조밀하게 둘러싼 일상성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이다. 이때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행위는 이러한 일상성에 대한 일시적인 반항이 된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어딘가에 돈을 내고 열심히 땀을 흘리’는 ‘많은 사람들’을 발견한다. 여기서 ‘세상 모든 사람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라는 또 다른 범주가 추가된다. 불특정 다수가 ‘나’처럼 일상의 무기력에 맞서고 있다는 발견은 ‘세상’과 ‘나’의 이분법을 넘어 ‘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틈새를 마련한다. 개인과 세계의 연결을 암시하는 이러한 인식은 곡 내부에서뿐만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해석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랑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와 ‘세상’의 사이에서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3절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등장하여 ‘나’에게 ‘털어버리라’는 조언을 한다. 이 ‘주변 사람들’은 ‘요가 선생님’이라는 층위로까지 구체적으로 표기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이해와 공감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원적인 미움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제 ‘나’는 함께 사는 ‘친구’가 있을 정도로 ‘세상’을 잘 살아내고 있다. 그런 친구가 돌아와 잠들 때에야 ‘나’가 잠이 든다는 것은 두 가지를 동시에 의미한다. 여전히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의 미움’이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를 잠들 수 있도록 해주는 ‘친구’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1절부터 3절까지는 ‘세상’과 ‘나’ 사이 관계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철저한 불화의 사이에 이해와 공감이 생겨나고, 불화에 맞설 수 있는 친밀함이 생겨난다. 이는 ‘나’가 ‘세상’에게 조금씩 받아들여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달리 말하면 타자로서 관계 맺기에 대한 우화라고도 할 수 있다.

 

다소 긴 첼로 반주 이후 이어지는 나머지 부분은 앞의 1~3절과 전혀 독립적인 내용처럼 보인다. 마늘을 까는 ‘할아버지-아버지’, 냉장고를 청소하는 ‘할머니-어머니’, 옷 사이즈가 맞는 ‘엄마-나’, 그리고 언니와 동생을 포함한 가족 서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언니, 동생이라는 남매 형태에서 이랑 본인의 가족 이야기임이 암시된다. ‘나’와 ‘아빠’ 중 한 쪽이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묻는 부분도 이랑과 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세대의 수직적 계승 및 남매 중 누구와도 다른 개별자가 되어가는 ‘나’에 대한 표현은 <가족을 찾아서>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가족’ 이야기로의 확장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후의 내용은 ‘내게 상처를 줬던 그 사건들’을 둘러싼 서술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나’는 ‘아빠’가 저지른 그 사건들이 ‘아무런 이유’도 ‘아무런 의도’도 없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명백한 가해-피해의 이분법이 해체되는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가 자신의 가해에 대해 어떤 이유도 반성도 찾지 못할 때에도 피해자로서의 ‘나’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비대칭성과 앙금으로 인해 서로 마주하더라도 ‘마냥 서글퍼져서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게 되고, (아마도 가해자가) ‘웃으며 인사’하더라도 ‘나’는 ‘모두 기억’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아빠’와 ‘나’ 사이의 균열은, 최초의 그때로부터 시작하여 ‘나’를 향한 미움들을 여전히 털어버릴 수 없는 1~3절과 통한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베란다에서 마늘을 까’는 사람이 바뀌고,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냉장고 청소를 하’는 사람이 바뀌며, ‘엄마의 옷’이 ‘나에게 맞’을 때까지 시간이 흐르고, 언니는 나와 달라‘지’며, 동생은 뚱뚱해‘지’는 등 끊임없는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미움’, ‘그 사건’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가족, 혹은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 ‘나’가 살아남고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이때 타자로서의 ‘나’는 단순히 이랑 본인을 넘어서, 소외와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을 대변한다. 노래는 ‘세상 모든 사람들’과 ‘나’의 뚜렷한 상징적 대립, ‘나’ 만큼이나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의 발견, 기본적인 공동체 단위로서의 가족 서사, 고통을 기억하는 ‘나’와 이를 잊어버린 가해자의 도식을 통해 여기에 공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매개한다.

 

참고문헌

 

이랑,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 달, 2017.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양효실 역, 인간사랑, 2013.

황효진, <이랑 "내 일상 자체가 여러 사회 문제 속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IZE, 2016.08.03.

 

 

 
신의 놀이
아티스트
이랑
앨범
신의 놀이
발매일
1970.01.01
 
가족을 찾아서
아티스트
이랑
앨범
신의 놀이
발매일
1970.01.01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아티스트
이랑
앨범
신의 놀이
발매일
1970.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