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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란 물리적, 사회적 실체로서의 물성을 가진다고 꾸준히 믿는다. 말과 글로 세계를 서술하는 작업은 동시에 그 세계를 만들기도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수행문에 가깝다. 언어로 시공간을 입은 세계는 쓰이고 말해지고 읽히고 들리는 한 기억되며, 믿는 만큼 존속한다. 그러나 얼마나 구체적으로, 단단하게, 그리고 언제까지? 그것은 언어가 끝내 정확히 성취할 수 없는 부분이며, 아무리 확대해도 미세하게 흐릿할 수밖에 없는 어떤 지점이다. 그 흐릿한 잔여에서 소설은 의미생산을 시작한다.
한유리의 <불멸의 인절미>는 인절미라는 기니피그에 관한 소설인 동시에 소설에 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이끄는 동인은 명백하다. 강인하고 아름다우며 오롯한 이 소동물이, 인간과 지구의 시선과 법칙을 벗어나 영원히 위대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유리는 (인물로서의) 유리가 ‘소설’을 쓰는 과정을 모두 서술한다. 그 소설은 ‘인생을 유료 구독 중인 노동자’인 유리에게 조금의 여유와 쉼을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면서 인절미의 영원불멸을 도모한다.
작품은 ‘애매한 작가’에 ’특출난 자격증을 요구하지 않는 여성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 유리와 성노동자 여름의 고되고 소소한 삶을 ’소설‘ 속 고귀한 외계인의 강연과 번갈아 제시한다. 먼저 떠난 티라미수를 기억하고 남아 있는 인절미를 부양하며, 추가로 자신들의 삶까지 살기 위해 노동하고 잔고를 계산하고 장을 보고 밥을 해 먹고 먹이는 과정은, 인간이라는 폭력적이고 미개한 과거 존재에 대한 미래의 서술을 통해 상대화된다. 인간은 자신과 비인간을 나눠 비인간을 목적에 따라 기르고 버리고 먹으며, ‘배가 불러도 먹이를 먹는 특이한 습성’ 탓에 반려동물에게도 먹을 것에 빗댄 이름을 짓는다. 이런 인간의 행태는, 기니피그 자신이 원하는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인절미’로 이름을 짓는 데에서도 드러나는데, 인절미를 인절미로 부를 수밖에 없는 유리만의 이유와 사랑은 외계인의 시선과 길항한다.
“인절미를 떠올리면 치밀어 오르는 뭉클하고 아린 기분, 그 애가 터지거나 으깨질 때까지 깨물어주고 싶지만 절대 그럴 수 없는 현실을 견디기가 힘들어서 누군가를 대신 때리기라도 하고 싶은 충동이 ‘인절미’라는 이름에 이미 포함되어 있고, 인절미가 그 모든 인간적인 행위를 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까지 저 외계인이 짚고 넘어갈까 봐 두렵다.“
분명 이 외계인과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존재들은 유리를 통해 생성되었지만, 이 존재들의 생각과 인식은 유리, 나아가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고 배반한다. 그렇게 유리가 구축한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유리 개인 혹은 인간이 아닌 오직 인절미를 위해 작동하는데, 그 과정에서 거기에 걸맞는 새로운 인식이 보편화된다. 동물이 동물을 착취하거나 부당하게, 혹은 배가 불러도 필요 이상으로 먹지 않는 세계.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손님과 대등한 협상력을 가지고 일하는, 존경받는 직업으로서의 성노동자와 그의 이름을 딴 별. 현실과 이상의 낙차를 메우기 위해 개연성이 부족해도 무언가를 바라는 소원 행위를 상상할 수 없는 세계.
사실 이런 인식들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걸 상상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인식들은,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으며, 조금 더 나아가자면 응당 그래야 하는 어떤 것들의 면면이다. 어떤 동물이 다른 어떤 동물보다 무엇이 그리 특별해서, 저마다의 자의식과 긍지를 가진 존재들을 부당하게 착취하고 소유하고 버리고 죽여 먹는단 말인가. 성노동자의 노동이 안전과 권리와 존중을 보장받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자신 혹은 자신의 집단이 왜, 무엇이 특별해서, 웬만하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들을 함부로 바란단 말인가. 무엇을 어떻게 정확히 바랄 줄도 모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인절미의 영원을 바란다. 불완전한 인간이, 사랑하는 한 존재를 위해 감히 뭔가를 바란다. 거기에 단단히 결부된 사랑은 그에 맞는 정의를 발명한다. 가능한 가장 그럴듯한 소원을 세밀하게 바라기 위해, 유리는 ‘계약서처럼 조건을 더해’나간 한 권 분량의 소원을 적는다. ’인절미가 내 안에서만 있‘지 않도록 그를 해방하고, ’우주에 유리도 없고 여름도 없고 그 둘이 살던 집도 없고 인생이 전부 끝난 아득한 미래‘로 용감하고 위대한 인절미를 보낸다. 흐트러지지 않는 소원을 위해서는 어떻게 그 소원을 빌게 되었는지 소상히 이야기해야 했고, 유리 자신의 애정어린 시선이 담긴 동시에 그의 시선에만 얽매이지 않는 시선이 필요했다. 소설로 불멸을 보장받기 위해 유리는 소설을 쓰는 소설을 써야 했다. 낯설게 하는 시선, 외부의 시선, 지금 여기의 인절미와 공명하면서도 아득한 다른 세계와 맞닿아 있는 경계 넘기의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인절미는 유리의 일기, 유리의 이야기, 화자의 서술, 외계인의 강연을 넘어선 곳에 위치한다. 이를 위해 마련한 한유리의 ’거짓말‘에는 아무도 여기에 속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 애초에 한유리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므로, 아무도 속지 않는다. 작품을 읽는 누구나 인절미가 위대하고 영원하게 살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 얼마나 주도면밀한 사랑과 믿음이 필요했는지 안다면 그건 자명하다. 그리고 그 믿음과 기억만큼 인절미는 그의 방식대로 강하고 아름답고, 반드시 행복하며, ’깊고 검은 눈동자 아래로 타오르는 생명의 불꽃‘을 태우며 살아간다. 인절미를 보고 경악한 청중은 ’우리‘가 되고, 그런 우리는 ’지구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래도 좋아진 인절미의 생사와 존재 여부 같은 해묵은 질문 따위는 무시한 채 그를 바라본다.
<불멸의 인절미>는 이처럼 우리 곁을 떠난 존재들이 온전히 떠나지 않았으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영원히, 씩씩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천명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사랑과 믿음이란 노동이 어떤 정의를 만들고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다. 언어의 흐린 경계를 어떻게든 보려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바라보고 사랑하려는 노력은 거기에 맞는 세계를 빚는다. 불완전한 인간은 그렇게라도 소망하고 믿을 수밖에 없고, 거기서 언뜻 스치는 미래상은 가야 하고 갈 수 있는 어떤 길을 살짝 드러낸다. 글은, 문학은 가끔 그런 일을 한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분명 반짝인 어떤 초월.
어쨌거나 인절미는 영원히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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