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빙 11

일하(지 못하)거나 놀(지 못하)거나, 살아 있(지 않)습니다

2022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52주기 기억주일이자 청년주관예배에서 나눈 글이다.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거예요.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1시, 2시 정도? 저는 왠지 잠이 안 와서 뒤척이고 있었고, 잠이 안 오던 차에 어떤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롯데월드에서 한 시간에 사람이 얼마나 입장하느냐에 관한 계산이었어요. 그러고는 당시 다니던 교회 예배가 끝나고 바로 롯데월드에 간다면 몇 시인지, 롯데월드는 몇 시에 여는지, 그러면 결국 내가 도착해서 입장할 때는 몇 명째일지 같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계산했어요. 계산을 끝내고 저는 대뜸 일어나 그날 월요일에 갈 수학 학원 숙제를 다 마쳤습니다. 상당히 충동적이었던 이 행동은, 당시 유례없는 롯데월드의 무료개장 소식을 듣고 이루어진 것이었습니..

아카이빙 2023.03.06

가난한 내 친구들과 부르는 혁명: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

이랑의 정규 3집 는 충격적인 앨범이다(사실 그의 앨범이 충격적이지 않은 적은 없었다). 여러 공연과 선공개곡으로 이미 알던 곡을 포함해도 이 감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곡이 그 자체로 한 편의 의미있는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각 곡들에 즐기고 비평할 거리가 넘쳐난다. 그 중에서도 타이틀곡인 [늑대가 나타났다]에서 이를 가장 강렬하게 느꼈으므로, 우선 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https://youtu.be/s4TqBnVNriU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 낯섦. [늑대가 나타났다]의 첫인상이다. 익숙한 음계나 연주와 동떨어져 귀를 잡아끄는 첼로 소리와 함께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

아카이빙 2022.12.30

정밀아, 서울역에서 출발

이태원과 파사주 이태원을 제대로 둘러본 건 작년 이맘때였다. 한적한 주말, 홍제동에서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자전거도 타고 커피까지 한 잔 마신 참이었다. 이태원에서 저녁 약속이 있다는 친구를 무작정 따라 talhae.tistory.com 여기에 처음 쓴 글에서 나는 이태원을 처음으로 제대로 걸어보았을 때 느꼈던 초라함을 이야기했다. 사실 이태원로나 보광로 같은 큰길을 제외하면 이태원 일대 지형은 대부분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하다. 그 분위기도 마냥 번쩍이지만은 않고 오히려 오랜 시간의 궤적이 군데군데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까지 주눅이 들어 있었는지 다소 어리둥절하다. 하지만, 실은 알 것도 같은데, 이전까지 내가 알던 이태원은 내 동기들과 주한미군들이 주기적으로 순찰하던 ..

아카이빙 2022.12.29

생각의, 여름이었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유머 중에 소위 ‘여름이었다 드립’이 있다. 대충 아무 말이나 써 놓고 끝에 ‘여름이었다’를 붙이면 그럴싸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어쩐지 청춘 로맨스물의 영향을 받은 걸로 보이는 이 유머는 의외로 정말 잘 어울리곤 했다. 이를테면 ‘저녁밥은 간단하게 라면에 김 싸서 먹었다’ 같은 문장은 어쩐지 구질구질한 자취생의 누추한 일상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뒤에 ‘여름이었다’를 붙이는 순간, 해가 채 지지 않고 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가운데 저 멀리 어디선가 쨍하지만 나지막이 들려오는 매미소리를 따라 산책이라도 나서는 듯한 풍경이 떠오른다. 아닌 것 같아도 어쩔 수 없다. 적어도 나에게 여름은 밑도 끝도 없이 강렬하고 푸르고 평화로운 나날로 상상되었고, 그 상상에 자주 배반당하면서도 결국 몇 안 ..

아카이빙 2022.12.29

정우와 김일두, 사랑과 종말에 걸쳐

좋아하는 가수가 다른 이의 노래를 커버해 부를 때 나는 두 곡을 좋아하게 된다. 원곡의 느낌과 커버의 느낌 모두를 놓지 못한 채 상황과 감정에 따라 찾아 듣는다. 그러다 보면 원곡을 부른 가수도 좋아하고 만다. 인디음악은 이렇게 알음알음 알아가는 매력이 있다. 이미 김목인에서 정우로, 정우에서 박소은으로 이어지지 않았던가. 근 한 달 반째 정우가 부른 김일두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 빠져 있다. 이 곡은 부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김일두의 2013년 앨범 [곱고 맑은 영혼]수록곡이다. 김일두의 음악과 목소리는 한대수에서 카쥬에 가까운 그 쨍한 소리를 덜어내고, 김민기에서 서정을 덜어내는 대신 처량하고 절절한 감성을 더한 어느 지점에 걸쳐 있다. 동시에 그의 음악은 흐린 날 부산 앞바다와 소주를 연상케..

아카이빙 2022.12.29

고도는 올 것이고, 우리는 갈 것이다

“시간은 멈춰 버렸는걸요.” 교회에 등록하고 얼마 안 되어 연극 모임에 참여했다. 부활절 주간에 올릴 계획으로 사무엘 베케트의 를 읽었다. 학교 수업에서 접한 베케트는 늘 ‘부조리극’이라는 키워드와 엮이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오직 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는 시골길 가운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를 기다리는 내용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고도는 오지 않고, 그 사이에 포조와 럭키가 등장해 한 바탕 놀다가 떠나갈 뿐이다. 그래서 왠지 ‘고도’ 하면 선형적 플롯의 거부, 전통적 시간관념의 해체 같은 말이 더 익숙했고, 그런 전제를 통해 작품을 읽을 때면, 마치 그 특유의 불가해함과 이로 인한 지루함이 ‘고도’ 특유의 속성인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그래서 딱히 재미를 느끼지 못해도 그 의의 때..

아카이빙 2022.12.29

<보잭 홀스맨>과 자기만의 병

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하려 하는데 내가 자기만의 병이라는 말을 꺼낸다면 도대체 그게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설명하려 한다. 최근 참으로 시간이 흐른다고 느낀 건, 즐겨 보던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이 시즌 6을 끝으로 마지막 에피소드를 공개했을 때였다. 은 과거 90년대 인기 시트콤의 주인공이었던 퇴물 배우 보잭 홀스맨을 주인공으로 하여 헐리우드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루는 애니메이션이다. 보잭은 전형적인 안티 히어로로서 과거의 영광만을 되풀이하며 인정욕구에 목말라 있는 말-인간이다(인간과 동물-인간이 공존하는 모습이 이 만화의 세계관이다). 작중에서 그는 술과 약을 달고 살면서 온갖 잘못들을 저지른다. 불행한 개인사와 감당 못할 인기는 보잭으로 하여금 변명과 자기연민을 거듭하게 만든..

아카이빙 2022.12.27

정우, 나에게서 당신에게

4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김목인의 공연을 보려다가 매진으로 인해 못 가게 되었고, 아쉬운 대로 그가 공연한 공간을 한 번 가본 뒤 마음에 들어 종종 거기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거기서 정우의 공연을 처음 보았다. 이후 정우의 공연을 찾아다니다가 함께 공연하는 박소은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김목인과 박소은을 거친 이제서야 정우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이전에 말했듯 김목인의 노래는 늘 잔잔하게 나를 위로해 주었고, 박소은의 노래는 그 강렬한 솔직함으로 아주 선명하게 다가왔다. 반면, 정우의 노래는 무엇이 왜 좋은지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날 해방촌에서, 리허설부터 기타 소리와 목소리와 가사로 나를 사로잡은 그때로부터, 숱한 공연과 팟캐스트 방송과 정규 1집 발매에 이르기까지 줄곧..

아카이빙 2022.12.27

박소은의 고강동, 꿈 같은 추상으로의 도약

0. 얼마 전에 가수 박소은의 공연에 갔다 온 이후 줄곧 그의 노래에 빠져 살고 있다. 솔직하고 거친 가사말, 거기에 깃든 매력적인 자의식, 그러면서도 사이사이에 스며든 관념어를 통해 추상성으로 도약하는 포인트, 기타 소리와 목소리와 멜로디가 어우러지는 탄탄한 실력 등 그를 설명할 말은 많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에게 처음 빠지게 된 노래인 을 이야기하려 한다. 1. 은 박소은이 살던 동네인 부천시 고강동과, 거기에 얽힌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노래이다. 컨트리한 멜로디로 이루어진 곡의 구성은 단순하다. ‘나는 아주 아주 돈을 많이 벌어서’, 혹은 ‘나는 아주 아주 많이 유명해져서’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엄마에게 고강동과 백화점을 통째로 줘 버린다는 벌스 부분은 ‘엄청 비싼 나라’, ‘엄청 비싼 비행기’..

아카이빙 2022.12.27

직업 음악가 김목인과 작은 한 사람

얼마 전 오랜만에 김목인의 음악이 생각나 다시금 들어보았고, 그가 꾸준히 나의 깨달음이자 위로였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https://youtu.be/3txIQhWwFyE 김목인 - 지망생, 3:06부터. “ 나도 그게 어떤 기분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모든 것의 뒷면은 아직 가려져 있고.” 그는 서울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며 갈피를 못 잡던 나에게 “나도 그게 어떤 기분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모든 것의 뒷면은 아직 가려져 있고”라며, 막 상경한 ‘지망생’의 설렘과 불안이 뒤섞인 읊조림을 안겨주었다. 인간관계에서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은/그런 세계”를 마주했을 때에는 섣불리 타자라는 불가능한 거리에 절망하는 대신, 인종과 젠더 등 숱한 범주와 정체성을 떠난 ‘개인의 순간’을 상상하고 품도록 ..

아카이빙 2022.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