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6일 예배에서 나눈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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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수 있는 부분과 설명할 수 없는 부분-그러니까 지금 말하는 것이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죠-을 거쳐서, 아무튼 저는 일을 잠시 쉬고, 운동을 하고, 상담을 받고, 논문을 쓰고, 사람을 만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기까지 많은, 정말 많은 과정이 있었는데, 그간의 아픔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건 하나님과 주변 사람을 통해 충분히 했습니다, 아마도요.
(중략)
운동하며 근육을 키우고 지방을 빼는 일은 삶에 대한 은유 같습니다. 생활과 삶의 코어를 다잡고 굳이 필요하지 않은 군더더기를 줄이는 일과 닮았거든요. 얼마 전에 만난 친구는 ’운동하는 연구자‘라는 주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연구자의 언어가 운동하는 신체를 가질 때에만 할 수 있는 한층 구체적인 사유에 관한 건데요. 이를테면 저는 자전거를 타며 풍경을 지나고 페달을 밟는 행위를 생각합니다. 자전거는 계속해서 밟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고, 정확히 밟는 만큼만 나아가며, 다른 교통수단처럼 사이 공간을 죽이지 않으면서 오롯이 신체로 내달리며 쉽게, 혹은 어렵게 기존의 내 공간과 장소로부터 이행할 수 있습니다. 삶, 일상 같은, 자칫 추상에 빠져버리기 쉬운 어떤 것에 가장 즉자적인, 신체를 통한 자극과 성장이 더해지면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변하는지를 느끼고 있어요.
한편 요새는 미하일 바흐친의 텍스트를 렌즈로 하고 돈키호테를 중심 텍스트로 해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문학이 사회의 ‘반영’이라며 이것은 저것이라고 비평하고 말거나 문학 내의 형식만을 분석하고 해당 텍스트의 읽기를 끝냈다고 선언하는 속편한 비평과 거리를 두고 싶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소 속은 불편해졌는데요. 여튼 형식과 내용의 유기적 통합, 텍스트의 내적 구조가 구체적인 사회, 역사와 만나는 과정을 탐구하는 데에 적절한 학자와 텍스트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사시와 기사도가 사라진 시대에 돈키호테는 모험을 하고, 그 모험은 필연적으로 우스꽝스럽게 실패합니다. 그러나 1권이 나오고, 소설 속 세계에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돈키호테는 정말 기사로 대접받으며 세계를 유랑합니다. 작중 인물이 소설의 안팎을 드나들고, 텍스트가 현실의 안팎을 드나드는 셈이죠.
논문을 생각하면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구절을 여전히 믿습니다. 잘 읽고 쓰는 일이 현실의 어떤 것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붙들고 있습니다. 미래가 가능하리라는 믿음, 삶이 계속된다는 믿음은 종종 구체적이고 단단한 노동처럼 여겨집니다. 자본이 마치 자신을 경유하지 않으면 노동이 아니라는 것처럼 속이지만, 실은 노동이란 이렇게 삶에 걸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학위논문은 정말 삶이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구나 하는 것도 느낍니다.
아무튼 그런 노동 중 어떤 국면, 직종이라 할까요, 그런 걸 현재 지나고 있습니다. 잘 해내고 싶고, 그럴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해요. 다만 어쩌면 생각지도 못할 여러 ‘하지만, 다만, 그러나‘ 들이 있겠지만, 말했듯 믿음도 노동이고, 다행히 저는 운동을 하고 있고, 근육이 조금이나마 있으며, 근육이 자라고 그러면 뭔가를 더 견딜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삶의 근육은 여전히 여기에 있고, 저는 용케 어떻게 살고 있습니다. 제 삶의 이모저모를 현상한 결과가 여러분 마음의 근육에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고 믿는 믿음-노동을 한번 더 해봅니다. 오늘의 고백을 가능하게 한 뭇 존재들에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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